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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가을 어느 날 - 김종해

 가을 어느 날 유모차를 타고 마트에 갔어 엄마가 천천히 미는 유모차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마트 가는 길 가을 햇살이 짜증나 세상에 처음 나왔다가 길거리에 떨어지는 나뭇잎 나뭇잎이 불쌍하다 나는 엄마가 천천히 미는 유모차 안에서 막 소리쳐 우는 거야 내가 소리쳐 우는 이유를 아무도 몰라 아가야, 왜, 아가야, 왜 유모차 지붕 위로 커다란 나뭇잎이 또 한장 떨어졌어 - 김종해, '모두 허공이야' 에서 김종해 시인의 '모두 허공이야' 시집은 첫 장부터 시인의 연륜이 가득 묻어있다. 삶의 대한 시각. 다가오는 죽음. 동네 평상 혹은 정자에 앉아, 초연히 풍경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런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시들이 하나하나씩 늘어놓아져 있다. 그런... 조금은 어둡고 메마른 분위기 중간에 놓여있는 이 '가을 어느 날' 이라는 시를 읽고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김종해 시인과 따뜻한 정종 한 잔 마시며 이야기 할 기회가 있다면 이 시와 같은 조용한 웃음을 지으며 내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 지 남은 생을 어떻게 정리하고 계신지 경청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 해 본다.

[책갈피] 암세포와의 거래

  내가 지난 밤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말이야 듣고 보니 암세포가 태생적으로 악하진 않더라 그냥 살 곳을 찾는 거였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자기애들을 데리고. 그걸 뭐라고 하겠어 근데 난 괜찮지 않다고 했지 지금은 내가 내 몸을 쓰니까 이사 오면 안 된다고 그래서 암세포랑 거래했어. 내 췌장의 작은 구석에서 암세포를 살게 해주고 나머지는 내가 가지는 거지. - 삼체 시즌1 3화에서 암과의 동거를 인지한지 어느새 1년 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몸 어느 한구석에 그들을 살게 허락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없애지 못할 바에야. 다만, 약속은 필요하겠지. 너무 몸집을 키우지 말아줬으면 해. 너의 비대해진 몸집이, 내 몸 유지를 위한 양분 공급을 방해하거든. 식구를 너무 늘리지 말아줘. 한 없이 늘어나는 너의 가족들을 모두 키우다간, 내 몸이 무너지고 말거야. 같이 오래오래 잘 살 수 있도록. 너도 너의 집과 가족들을 잃는 건 싫잖아?

[책갈피] 별 부스러기

  그거 알아?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결국 아주 오래 전 우주 어딘가에 있던 별에서 만들어 거래.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별 부스러기 라고도 할 수 있는게 아닐까?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책갈피] 나태주 - 놓아라

  놓아라 우선 네 손에 쥐고 있는 것부터 놓아라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놓고 네가 듣고 있는 것을 놓아라 내친김에 네가 생각하는 것을 놓아라 무엇보다도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놓아라 그 위에 너 자신을 놓아라 비로소 편안해질 것이다. <필사, 어른이 되는 시간>, 나태주 -----------------------------------------------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놓지 못한 것들이 많다. 해야 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이루고자 했던 것. 이루어야 하는 것. 그 말을 믿으면, 남은 기간 동안에는 이룰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이제 놓아야 할 것들은 놓고, 현실 적인 것들을 보며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걸까. 수십여년간 쥐고 있던 것들을 놓으면 비로소 편안해 지는 걸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새끼 손가락에 감겨져 있는 가는 실을 위태위태 하게 바라보는 나를 보았다.